라고 적기는 했지만. 사실 올해부터는 손 다이어리를 쓰고 있다.

그래도 마침 시간이 좀 남으니까,  22년 4월 이후의 내 삶을 돌이켜보는 시간을 좀 가져보려고.

 

작년 대비 굉장히 많은 것이 달라졌다.

 

좋은 것부터 써볼까.

승진했다.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있을 정도의 고과 트랙을 기록했다. 엑셀 책을 몇 권 떼면서 약간 데이터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. 휴덕기간이 끝났다! 카메라에 맥북프로까지 온갖 것들을 사들였고, 경험해본 적 없는 행복감을 느낀다. 혼자 제주도도 가보고, 페스티벌도 다녀오면서 혼자로서만 느낄 수 있는 재미를 조금 알게 되었다. 이런저런 영향으로, 지지부진 끌던 연애(라기보다는 동종업계 파트너에 가까웠던 관계)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. 

 

나쁜 일은, 크게 두 개.

업무 스트레스가 굉장하다. 맡기 싫던 일을 떠맡게 되었다.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너무 힘든 일을 갑자기 내가 전부 다. 당연히 하기도 싫고, 성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. 원래 완벽할 수 없는 일이고, 누가 해도 같은 감정을 느낄 일이지만, 그게 뭐 중요한지. 냉정하게 어차피 남남, 다 그저 얼굴 앞에 대고 하는 위로인 게다. 티내지 말았어야 했는데, 투덜거린 것을 매우 후회했다. 결과로 말해야 하는 조직에서 결과물이 흐트러지니 결국 나는 논 애가 되었다는 생각에 너무 괴로웠다. 일에 두드려맞으면서도 어떻게든 회사와 일상을 분리해서, 스스로가 망가지지 않게 하려고 온갖 일들을 다 해왔는데, 딱 30일 정도를 아예 일상이 망가진 채로 시간에 질질 끌려왔다. 모든 게 엉망이었지만, 다른 것보다, 꽃이 썩어있는 걸 뒤늦게 발견했을 때 진짜 마음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. 시간이 저절로 흐르는 덕분에 체력을 조금씩 회복하고 있지만 자아효능감이 아직 엉망이다.

 

미래가 너무 흐려서 힘들다. 이런 식의 이별을 경험하고 나니까, 뭔가 이제 다 끝난 기분. 앞으로 나아갈 길은 끝난 느낌. 스스로 느끼기에 내가 이성에게 그렇게 매력적일 거란 생각은 없지만.. 그래도 어쨌든 나는 내가 좋아해야만 연애가 시작되는 사람인데, 내가 누굴 더 좋아할 수 있을까 싶은 거. 그리고 누가 그런 마음을 내게 들이밀어도, 그 마음을 내가 믿을 수 있을까 싶은 거. 겪은 적 없는 설렘을 받더라도, 나는 그 마음을 오롯이 믿지 못할거고, 어떻게든 나는 마음을 조금만 주려고 노력하겠지. 언제 끝나더라도, 현재 선에서 최소한의 타격만 받도록 말이다. 세상에 한편뿐인 드라마 같지만, 나는 인생에 드라마는 없다고 믿으니까. 참 피곤한 성격이군...

 

지난 5년간 그렇게 타오르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하지만, 어쨌든 기다리는 쪽은 나였다. 인정해야 한다. 내가 더 좋아했던 거다. 그 감정들의 마무리가 고작 이런 식인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. 진작 끝났어도 안 이상할 관계를 그냥 내 마음으로 이끌고 온 거지. 계속 이어갔더라도 종국에 그렇게 행복하진 않았을거야. 알고 있다. 계속 얘네 집안이랑 결혼은 도저히 안되겠다 생각하면서 만나온 거고, 만약 결혼까지 이어졌더라도(우리 부모님이 허락하셨을 리가 없지만) 내가 생각해온 행복한 미래를 그리진 못했을 거 아주 잘 알고 있다. 이렇게 구구절절 생각하며 읊는 걸 보면 아직 마무리가 덜 된 걸까. 당연한 건가. 시간은 무서운 거니까. 하다못해 모나미볼펜이라도 5년을 계속 써왔으면 그건 그냥 볼펜이 아닌 거니까. 근데 사실 진짜로 나는 외롭지 않았어. 다른 것보다 이게 진짜 웃긴 일 아닌지.

 

그래서, 업무도, 연애도, 그냥 모든 일상이, 이 삶이, 내가 생각하던 방향성이.

전부 다 틀린 것 같아서 정말로 너무 괴로웠다.

 

그럼에도 불구하고.

요즘의 나는 내가 올해 내내 느끼는 이 괴로움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다. 큰 성과다.

 

우연히 얻게 된 보물같은 조언이 시작이었다. 남들이 판단하기에 좋다 나쁘다가 아닌, 내 삶에 내가 초점을 맞추어서 고민하는 점이 참 좋아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. 아무 해결책도 아니었지만 그 말이 크게 위안이 되었다. 막연히, 목표같지 않은, 지금을 회피하고 싶어서 흔히들 중얼거리는, 진짜 목표인지 아닌지조차 모호한 아무말이 아닌, '더 재미있는 삶'이라고 콕 집어 이야기할 수 있는 멘탈은 아직 나한테 남아있다. 내딴에 최선의 방식으로, 나름대로 건강하게, 내가 겪는 문제를 헤쳐나가고자 나는 노력하고 있었던 거다.

 

그리고 뇌과학 책을 읽으면서. 내가 겪는 어려움들이 내가 나약해서, 뭔가 남들과 달리 부족해서, 내 품성이 남들과 달리 더 예민해서 겪는 문제가 아니며, 단지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해결책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머리가 조금 더 맑아졌다. 인지뇌과학적 측면에서 나는 내가 겪는 괴로움을 해결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. 헤쳐나갈 길이 있기만 하면 된다.

 

물론 그 실마리란 것들이 모두 경험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방법들이었다. 그래도, 내 나름 가지고 있던 노하우들이 단순 우연이 아니라 수많은 연구를 통해 나온 결론들이며, 사실 어떤 이유로 그렇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서 읽어보니까 너무 재미있더라고. 나갈 길이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, 그리고 내가 그 길을 스스로 찾아서 나아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고 나니까 이제서야 내가 겪던 괴로움에서 내 자아를 분리해내고, 지금 겪는 문제를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.

 

물론 미친 듯이 몰아쳤던 그 바쁨이 지나고 체력 회복기에 들어와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. 사실 아직 그렇게 재미있게 살고 있진 않다. 이게 번아웃이구나 싶으니까 갑자기 내가 겪던 모든 감정들이 이해가 되더라고.  방전되어 있으니까 뭘 본들 즐겁겠어. 다 내려놓고 쉬고 싶지. 그치만 안 움직이면 더 가라앉는 건 경험적으로 알고 있으니까, 원래 좋아하던 것들, 보통의 사람들이 좋아하던 것들은 계속 찾아서 해보고 있다. 워낙에 놀러다니고, 이것저것 일을 벌이고 있으니 남들이 보면 아주 잘 살고 있는 애처럼 보일테다. 그치만 내 딴에 이것들 모두 다 도전이다. 바로 서기 위한 도전.

 

한편으론 아직 너무 어린이라, 처음 겪는 고비라서 이런가 보다 싶기도 하고. 나두 아직 애기인게지. 근데 그게 그렇게 싫진 않았다. 좀 차갑고 냉정한 얘기지만.. 나도 드디어 직장인다운 사회생활이 시작되는군 하고. ㅋㅋㅋ 뭐 이러다 보면 자리를 되찾겠지. 다시 일어서면 다음 방향을 찾아보려고 한다. 11월 시험도 있고, 여행 일정도 있고. 블로그도 관리하고, 집도 더 깔끔하게 꾸미고, 영상도 더 배우고.

 

원래 방향성이 있는 삶이 제일 재미있는 거다. 방향이 어디든.

 

 

**글을 한참 써내려가다 깨달았는데, 내 바닥에 깔려있는 불신은, 다 네가 뿌려놓은 씨앗이었구나. 버려도 될 태도였다. 쉽게 툭툭은 안 되더라도. 굳이 이렇게까지 꼬여있을 필요는 없는 거였는데. 이것도 언젠간 고쳐지려나!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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